




이선경, 이가영, 박지혜, 박은지. 30~50대에 이르는 네 명의 작가는 경남 양산, 밀양(삼랑진), 거제 그리고 울산에 자택이나 작업실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지난 11일 부산 디오티미술관에서 개막한 ‘빈방 프로젝트: 특별한 예보는 없었다’라는 기획으로 이들을 불러모은 학예팀 중 장서홍 큐레이터는 “작가 간 공통점은 딱히 없지만, ‘감정의 기후’라는 키워드로 네 사람을 초청하고, 연결했다”면서 “작가들은 서로 다른 감정을 개성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다”고 밝혔다.
2023년 디오티미술관이 ‘빈방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하나의 전시 공간을 ‘빈방’으로 열어 지역의 청년 작가를 소개한다”는 취지였는데, 올해는 작가 연령대를 넓히고 전시 규모도 키웠다. 미술관 전층을 털어서 4개의 ‘빈방’을 마련하고,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선경(양산), 이가영(삼랑진) 작가 외에도 박지혜(거제), 박은지(울산) 작가까지 대상과 지역을 넓혔다. 각각의 빈방은 작가의 결대로 개성 있게 꾸몄다. 기획전이지만 개인전 같은 전시이다.


미술관 출입문이 있는 지상 2층(제4전시실)에서 맨 먼저 관람객을 맞는 건 이선경 작가의 방이다. 50대에 막 접어든 이선경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심리적 상황과 풍경을 자화상으로 담아낸 작품을 선보여왔다. “이번 전시에 정해진 주제는 없고요. 최근 몇 년 사이 작업한 것 중에 한 번 전시했다 내렸다든지 제가 특히 좋아하는 회화 작품 6점과 영상 작품(1점)을 더해 총 7점을 선보입니다.” 이 중 한 작품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날아오르다’라는 작품이다. 지난해 암 선고를 받은 작가의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작업실에 와서 3분의 1 정도 진행된 작품을 보고 “너무 좋다”면서 “나, 더 살고 싶어!”라고 한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서다. 작가가 즐겨 쓰던 붉은색보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블루와 오렌지색 계열 나비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뒤 엄마 건강도 많이 회복되셨어요. 이런 사연을 모르는 일반 관람객도 그저 제 그림 앞에서 좋은 기운을 받고 가시면 좋겠어요.”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 속에서 일어난 감정의 일기예보를 담아낸 이 방은, 장수 혹은 생명력, 부활 등을 의미하는 나비의 상징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상처와 치유, 공감과 위로를 전한다.


3층(제3전시실)으로 올라가면 30대 박은지 작가의 방이다. 울산대 미술학부 서양화과를 졸업한 박은지는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보이지 않는 감정과 감각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전시도 그 연장선에서 꾸몄다. “인간관계를 ‘물’에 비유한 작업입니다. 물도 담겨 있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뀌기도 하고, 환경에 따라 변하는데, 우리 인간도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감정도 물처럼 명확한 경계 없이 출렁거린다고 할까요.” ‘투명의 깊이’, ‘멜팅’(Melting) 시리즈, 9m 길이의 대형 작품 ‘수평선’(2023), 설치 작품 ‘웨이브’(Wave) 등 총 8점을 전시한다. 관계 속에서 잔물결을 일으키며 출렁이는 물과 감정의 기후를 투명한 아크릴과 에폭시의 반투명 층위로 입체감 있게 시각화했다.



4층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에는 40대의 이가영 작가와 박지혜 작가 방이 각각 마련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를 졸업한 이가영은 초기의 단색 회화로부터 시작해 최근의 지점토 작업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작업을 망라해 선보인다. “2007년부터 2014년 사이의 그림은 단순한 원과 사각, 선으로 화면을 구성한 무채색 회화 연작입니다. 2017년 서울에서 삼랑진으로 거처를 옮긴 뒤 새로 시작한 나무 조각 작업과 지점토, 테라코타, 클레이의 먹 작업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작품 50여 점을 전시했습니다.” 서울에서 삼랑진으로 거처를 옮긴 뒤 변화한 삶의 기후는 작업의 매체와 형상마저 바꾸어 놓았다. 최근 작업에서는 금기와 욕망, 에로티시즘을 바탕으로 기괴한 형상을 다루지만,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그대로 유지한다.


홍익대 회화과 출신의 박지혜 작가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겪으며 대도시를 벗어나 자연과 가까운 삶을 고민하던 중, 이전의 여행과 한 달 살기 등으로 좋은 기억이 있었던 거제를 정착지로 선택해 5년째 살고 있다. 거제의 자연과 일상에서 발견한 생명력을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거제로 이주한 뒤 작품 세계와 삶의 방향성에 변화가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도시를 벗어나 거제에 안착하며 맞이한 삶의 기후 변화는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과거의 작업까지 따뜻하게 품어 안게 했다. 2026년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거제로 옮기기 전에는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몇 작품은 거제살이를 통해 비로소 마무리하기도 했다. 총 16점을 전시한다.
디오티미술관 홍명희 관장은 “‘빈방 프로젝트’는 전관을 하나의 서사로 구성하는 기획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서로 다른 작가의 감각과 작업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관람자의 사유를 확장해 나가는 디오티미술관의 지속적인 프로젝트로 키워 나가겠다”고 전했다. 전시는 9월 30일까지. 입장료 무료. 문의 051-518-8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