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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작가 개인전 ‘물:집’… 사적 서사로 읽어낸 국가 폭력의 기억

2026 홍티아트센터 14기 입주 작가

31일까지 ‘이씨! 표류기’ 등 총 5점 전시
용기와 화해, 새로운 역사 써 내려가
올봄 2026 오월미술제 참가에 앞서 홍티아트센터 작업실에서 ‘이씨! 표류기’ 한 권을 들고 포즈를 취한 이현정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올봄 2026 오월미술제 참가에 앞서 홍티아트센터 작업실에서 ‘이씨! 표류기’ 한 권을 들고 포즈를 취한 이현정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가장 가까운 가족의 아픔조차 함부로 가져다 쓸 수 없었어요. 피하고 싶었던 아킬레스건이었지만, 이젠 세대를 거쳐 흘러내린 그 쓰라린 기록을 어루만지고 싶습니다.”

말해지지 못한 사적 서사와 국가 폭력의 기억을 어루만지는 이현정 작가의 개인전 ‘물:집’이 오는 31일까지 부산문화재단 홍티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26년 홍티아트센터 제14기 입주 작가 연작전 ‘이음(∑Mmm)’의 세 번째 무대로, 생애 처음 부산에 머물게 된 작가가 오랜 세월 집안을 눌러온 침묵과 상처의 실체를 추적하며 완성한 전시다.

그간 회화, 설치, 퍼포먼스, 장소 반응형 프로젝트를 오가며 작업해 온 작가는 천, 거즈, 실, 안료, 빛, 사운드 등을 활용해 몸과 물질에 남은 감각의 흔적을 탐구해 왔다. 대표작 ‘이씨! 표류기’, ‘가족사진’을 비롯해 신작까지 총 5점의 작품이 공개되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개인의 기억과 거시적 역사가 교차하는 지점을 오롯이 드러낸다.

홍티아트센터 전시장 입구 통로에 마련된 이현정 작가의 작업 과정이 담긴 아카이브 테이블. '이씨! 표류기' 곁책 <그 후에 도착한 기록>에는 2023년 이후 알게 된 것과 가족의 목소리 전사문, 녹음되지
홍티아트센터 전시장 입구 통로에 마련된 이현정 작가의 작업 과정이 담긴 아카이브 테이블. '이씨! 표류기' 곁책 <그 후에 도착한 기록>에는 2023년 이후 알게 된 것과 가족의 목소리 전사문, 녹음되지 않은 후속 기록 등이 담겨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
홍티아트센터 전시장 입구 통로에 마련된 이현정 작가의 작업 과정이 담긴 아카이브 테이블. '이씨! 표류기' 곁책 &lt;그 후에 도착한 기록&gt;에는 2023년 이후 알게 된 것과 가족의 목소리 전사문, 녹음되지
홍티아트센터 전시장 입구 통로에 마련된 이현정 작가의 작업 과정이 담긴 아카이브 테이블. '이씨! 표류기' 곁책 <그 후에 도착한 기록>에는 2023년 이후 알게 된 것과 가족의 목소리 전사문, 녹음되지 않은 후속 기록 등이 담겨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


전시장 입구 통로에는 작가의 작업 과정이 담긴 아카이브 테이블이 마련됐다. 2023년 ‘이씨! 표류기’를 처음 제작하며 기록한 자료부터 이후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오류를 바로잡은 기록까지 한자리에 모았다.

단기 4256년(1923년)생 할아버지와 1975년생 남동생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1949년 ‘예비검속’ 사건으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할아버지(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 규명 결정)의 죽음, 부산 ‘문현동 소년기술원’에서 남동생이 겪은 인권 유린의 기억이 그것이다. 작가는 교차 검증 과정에서 확인한 명칭의 오류나 정보의 혼란조차 삭제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남동생이 겪은 일이 형제복지원인 줄 알았는데, 부산에 와서 다시 확인해 보니 문현동 소년기술원이었어요. 몸의 체험은 같았지만 명칭이 달랐던 거죠. 진실은 한 번에 도착하지 않았고 어떤 말은 늦게, 어떤 진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 혼란스러움조차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씨! 표류기' 전시 전경. 김은영 기자 key66@
'이씨! 표류기' 전시 전경. 김은영 기자 key66@
'이씨! 표류기' 낱권 책. 사진은 단기 4256년으로 할아버지 책이다. 김은영 기자 key66@
'이씨! 표류기' 낱권 책. 사진은 단기 4256년으로 할아버지 책이다. 김은영 기자 key66@
'이씨! 표류기' 낱권 책. 사진은 1975년생 남동생 책이다. 김은영 기자 key66@
'이씨! 표류기' 낱권 책. 사진은 1975년생 남동생 책이다. 김은영 기자 key66@


2023년 ‘이씨! 표류기’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작가, 남동생을 위한 다섯 권의 책이었다면, 이번 ‘물:집’에서는 세 권이 더해져 모두 여덟 권으로 늘었다. 하지만 책 수가 늘었다고 가족의 이야기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새롭게 추가된 세 권에는 글을 넣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작가가 감히 대신 공개하거나 설명할 수 없어서다. 아직 묻지 못한 것, 물어도 답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작가라도 함부로 가져다 쓸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백 겹의 거즈에 직접 손바느질을 해 제본한 신작은 겹겹이 쌓인 잔혹한 시간성을 형상화한다. “200겹가량의 거즈를 잘라 직접 수를 놓았어요. 물이 흘러내리듯 고통과 슬픔이 세대를 넘어 아래로 흡수되며 계속 이어지는 모습을 표현했죠. 그 축적된 고통 자체가 하나의 물질인 셈입니다.”

전시명 ‘물:집’은 흘러넘치고 쌓이는 ‘물’의 속성이자, 쉼 없는 마찰과 압력으로 피부에 생겨 건드리지도 터뜨리지도 못하는 아픈 상처인 ‘물집’을 중의적으로 뜻한다. 작가는 언어를 차단당한 채 사회적 외곽으로 밀려나야 했던 가족의 삶을 온전히 끌어안는다.

“국가가 가해자임에도 인정하지 않는 긴 시간 동안 정보로부터 차단되고 은폐됐어요. 언어를 가져본 적이 없어 소통하는 법도 몰랐죠. 내가 못나서, 우리 가족이 부족해서 이렇게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국가폭력의 거시사와 개인의 미시사가 맞물린 문제입니다. 지속적인 압력 탓에 터뜨리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물집’처럼, 한국사를 건너온 수많은 타인 역시 저마다의 물집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2026년에서 부르는 1983' 전시 전경. 김은영 기자 key66@
'2026년에서 부르는 1983' 전시 전경. 김은영 기자 key66@


특히 '2026년에서 부르는 1983'은 작가의 개인사가 국가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1973년생인 작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전국 웅변대회에서 ‘이승복 어린이’ 연설했던 경험을 회상하며, “국가 폭력 희생자의 손녀가 국가 주도의 반공 연설을 했던 아이러니”를 작품으로 풀어냈다.

이번 작업은 가족을 향한 연민이자 스스로와의 화해 과정이기도 하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아버지 때문이라 여겨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국가폭력의 인과관계를 이해하고 나니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가 얼마나 외롭고 불행했을지 보였습니다. 평생 억울함을 들어줄 사람 하나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이번에 아버지 손을 한번 잡아드리고 싶었습니다. 끝내 만날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요.”

'이씨! 표류기' 낱권 책. 사진은 1973년생 이현정 작가의 책이다. 씨앗이 뿌려져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
'이씨! 표류기' 낱권 책. 사진은 1973년생 이현정 작가의 책이다. 씨앗이 뿌려져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


작가는 덧붙인다. “과거엔 가문의 흑역사라 숨기고 싶었고, 가족의 아픔을 함부로 가져다 쓰는 게 도덕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해 주저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남겨진 삶을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대신, 주도적으로 씨앗을 심으며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책 위에는 작은 씨앗들이 흩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전시장 내에 드러난 현상들 사이에 관객이 머물고 이동하는 동안, 말로 다 설명되지 않은 것들의 크기와 무게를 스스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 문의 051-263-8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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