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미학을 관통하는 핵심에서 ‘철학적 담론과 일상적 감각의 결합’을 빼놓을 수 없다. 절제된 우아함과 섬세한 취향,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프랑스 미학에 깊은 매력을 더한다. 한·불 수교 140주년(1886~2026년)을 맞아 부산에서는 이러한 프랑스적 시선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는 주요 전시가 열리고 있다.
특히 미셸 앙리의 색채 속에서 감각을 깨우고, 랄프 깁슨의 프레임 안에서 절제된 우아함을 마주하며, 띠에리 아르두엥의 씨앗 앞에서 미시적 담론에 빠져드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전시지만, 부산이라는 도시 위에서 완성되는 거대한 ‘프랑스 미학 지도’라 할 만하다.
■감각의 폭발: 미셸 앙리의 ‘위대한 컬러리스트’

여정의 시작은 일상의 감각을 극치로 끌어올리는 미셸 앙리(1928~2016)의 캔버스다. ‘미셸 앙리: 위대한 컬러리스트’는 부산 남구 부산문화회관 전시실에서 10월 25일까지 관람객을 맞는다. 부산 최초 공개작 10점을 포함해 총 110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개막 한 달 만에 1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모았다.

앙리의 화폭은 창가와 꽃, 풍경 등 일상적인 소재에서 출발하지만, 폭발적인 색채의 밀도와 유화 특유의 두터운 질감을 통해 대상을 영원한 생명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특히 그가 사랑한 붉은 양귀비꽃과 강렬한 보색 대비는 찬란한 빛과 색으로 가득한 감성적 유토피아를 선사한다.
부산문화회관 박민희 교육전시팀장은 “작가의 작업 세계나 심오한 가치관을 담은 현대미술에서 감동을 얻기도 하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점, 그리고 일평생 한 소재에 집중해 온 작가의 아우라가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점이 관람객의 호응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인기 비결을 설명했다. 관람 시간은 화~일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이며, 입장 마감은 오후 6시다. 관람료는 성인 기준 1만 8000원이다.
■절제의 우아함: 랄프 깁슨의 ‘프렌치 얼루어’


프랑스 미학과 기호학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현대사진 거장 랄프 깁슨이 포착한 프랑스는 ‘지극히 프랑스적’이다. 지난 6월 시작한 ‘French Allure 프렌치 얼루어’는 내년 4월 10일까지 해운대구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에서 열린다. 프렌치 얼루어는 프랑스 특유의 우아함과 세련미, 말로 규정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분위기를 의미한다.
깁슨이 1971년부터 50여 년간 기록한 작품 103점을 미술관 3개 층에 걸쳐 선보인다. 전시는 2층 ‘프렌치 아방가르드: 시대를 앞선 예술정신’에서 시작해 1층 ‘르 살롱: 내밀한 사색 공간’, 지하 1층 ‘프렌치 헤리티지: 영광의 뿌리가 된 문화유산’으로 이어지는 동선이다.

특히 프랑스 리옹에 있는 뤼미에르 형제의 저택 겸 박물관에서 촬영한 사진이나, 니스에서 촬영한 깁슨의 셀프 포트레이트, 마르셸 프루스트의 실제 겨울 코트 모습, 사진예술이 시작된 부르고뉴 남부 샬롱쉬르손 풍경, 마네의 ‘올랭피아’를 과감하게 크롭해 포착한 작품, 바흐 칸타타 악보나 발자크 원고 등 하나의 프레임 안에 두 장의 사진을 나란히 배치한 ‘딥틱’(Diptych)을 살피며 두 이미지 간의 관계를 유추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은문화재단 조민정 이사는 “서로 다른 사진 사이에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게 랄프 깁슨의 시각적 시그니처”라며 “결국, 깁슨 사진이 보여준 것은 ‘A는 B다’와 같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하 1층에서는 깁슨과 김형수 고은문화재단 이사장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 관련 기록도 함께 만날 수 있다. 김 이사장은 2014년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서훈을 받은 데 이어, 지난 5월 한·불 양국의 예술 및 보훈 협력 증진에 20년 넘게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오피시에로 승급 서훈됐다. 전시 관람 시간은 화~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이며, 입장료는 3000원이다.
■미시적 담론: 띠에리 아르두엥의 ‘Seed Stories’


마지막 시선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공간인 ‘씨앗’으로 향한다. 프랑스 사진가 띠에리 아르두엥은 ‘현미경 사진’ 기법을 통해 세계 각지의 씨앗을 하나의 ‘초상’으로 담아낸 작품 87점을 오는 30일까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선보인다.
전시는 △씨앗의 여정 △인류세의 시작 △다양성의 혼합, 하나의 장 △인문주의적 생태를 위한 정책 등 총 4개 섹션으로 구성된다.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 부산을 대표하는 대저 토마토와 기장 대파를 떠올릴 수 있는 씨앗을 촬영한 작품 3점도 포함돼 있다.


사소한 오브제에서 인문학적·역사적 맥락을 읽어내는 프랑스 구조주의적 시선이 돋보인다. 극도로 확대된 씨앗의 표면은 단단한 조각품이나 신화 속 기호처럼 다가온다. 지극히 작은 일상의 미시적 사물이 정밀한 렌즈를 거쳐 식량의 역사와 농업 문명, 생태계의 서사를 품은 존엄한 존재로 확장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개관 시간은 화~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이며,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함께 들러볼 전시

이 밖에도 부산 감천문화마을에는 한·불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지난 3월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를 주제로 한 상설 전시관 ‘리틀프린스하우스’(유료)가 문을 열었다. 프랑스 생텍쥐페리 재단의 공식 후원과 승인을 받은 국내 최초의 어린 왕자 문화 전시관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프랑스어권 예술가 그룹 ‘뉘앙스’는 지난 6일부터 오는 30일까지 해운대구 부산 프랑스문화원 아트 스페이스(ART SPACE)에서 ‘현재의 고고학’전을 열고 있다. 전시 제목인 ‘현재의 고고학’은 고대 유적을 발굴하듯 현대 한국의 풍경을 탐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팀 프랑코, 카미 도비, 세바스티앙 시몬 등 14명(팀)으로 구성된 뉘앙스의 예술가들은 ‘의도치 않은 고고학자’로서 각자의 감수성을 결합했다. 사진과 드로잉, 영화, 설치, 음악,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도시와 사회, 문화의 변화를 기록한다. 무료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