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가는 자신의 매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몸짓 노래 문학(글) 그림 연기 등 각자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품을 내놓는다. 한 가지 매체에 주력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같은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해 가는 걸 자주 본다. 요산김정한문학관에서 현재 진행 중인 ‘섬, 사람, 침묵-모래톱 이야기’가 그러하다.
부산을 대표하는 소설가, 요산 김정한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 (1966)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권력과 개발의 논리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민중의 현실을 담담하지만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산업화와 사회적 폭력 속에서 무력한 침묵과 단단한 저항 이야기를 동시에 보여준다. 소설의 배경인 을숙도는 원래 전국에서 손꼽히는 철새 도래지이자 맑은 섬이었지만, 1987년 하굿둑 건설과 준설토 적치장으로 인해 생태계가 급격히 변화했다. 산업화와 개발은 자연을 훼손하고 결국 삶과 공동체도 단절시킨 실제 사례이기도 하다.
1966년에 발표된 소설이지만, 소설 속 사건과 메시지는 2025년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한 현재진행형이다. 부산의 시각예술 작가들이 이 소설을 자신들만의 언어로 재해석해 요산김정한문학관에서 전시를 열고 있다. 회화, 영상, 사운드 작품으로 변신한 <모래톱 이야기>는 직설적으로 직관적인 느낌이 강하다.
김근예 작가는 소설 이야기를 회화로 표현했다. 섬의 풍경, 인물의 감정, 말하지 못하는 울분과 침묵의 정서를 그림에 고스란히 담았다. 부드러운 회화선에 강렬한 감정이 요동치는 듯하다.
김민정 작가는 재개발로 변화한 을숙도의 현재 풍경을 기록했고 사라진 것과 새로 들어선 건축물을 비교하며 개발과 환경, 기억의 문제를 말한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그림으로 선명한 풍경이 묘하게 슬픔을 머금고 있다.
정만영 작가는 낙동강 하류와 모래톱에서 채집한 소리와 영상을 기반으로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을 직접 만지고 체험하며 관람객은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적극적으로 <모래톱 이야기>에 몰입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부산의 젊은 작가들은 오래전 발표된 소설로 머물던 <모래톱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 속 문제의식으로 되살아나게 했다. 요산 김정한의 정신이기도 한 부당함과 폭력과 타협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좀 더 강렬하게 전하고 있다.
문체부와 국립한국문학관이 주최한 ‘지역문학관 활성화 사업 공모’에 당선돼 전시가 진행될 수 있었다. 21일까지 요산김정한문학관 전시실뿐만 아니라 부산 중구 중앙동 또따또가에서도 같이 열리고 있다. 문의 051-515-1655.